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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달라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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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188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리옹의 학교 교사, 파리의 고등학교 교사 등을 거쳐 1912년 카르팡트라 시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소위로 임관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전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세 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으며, 뮌헨 협정 체결에 관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전후 프랑스 의회 하원의원과 아비뇽 시장을 지냈다. 1970년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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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달라디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달라디에 (1930년대)
이름에두아르 달라디에
로마자 표기Édouard Daladier
출생일1884년 6월 18일
출생지카르팡트라, 보클뤼즈주, 프랑스
사망일1970년 10월 10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소속 정당급진사회당
배우자마들렌 라퐁 (1917년–1932년, 사별)
잔 부쿠아랑 (1951년–1970년)
자녀
피에르
마리
학력콜레주 리세 앙페르
직업역사학자, 교사
군사 복무
소속프랑스 프랑스군
계급대위
복무 기간1914년–1919년, 1945년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베르됭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이터 성 전투
정치 경력
각료평의회 의장1938년 4월 10일 – 1940년 3월 21일
1934년 1월 30일 – 1934년 2월 9일
1933년 1월 31일 – 1933년 10월 26일
대통령알베르 르브룅
알베르 르브룅
알베르 르브룅
국방부 장관1936년 6월 4일 – 1940년 5월 18일
1932년 12월 18일 – 1934년 1월 29일
총리레옹 블룸, 카미유 쇼탕, 본인
조제프 폴봉쿠르, 본인
하원 의원1946년 6월 2일 – 1958년 12월 8일
1919년 11월 16일 – 1940년 7월 10일
선거구보클뤼즈주
이전 총리레옹 블룸
카미유 쇼탕
조제프 폴봉쿠르
다음 총리폴 레노
가스통 두메르그
알베르 사로
이전 국방부 장관루이 모랭
조제프 폴봉쿠르
다음 국방부 장관폴 레노
장 파브리
서명
에두아르 달라디에 서명

2. 생애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1884년 6월 18일, 프랑스 보클뤼즈주 카르팡트라에서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리옹의 뒤파르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치에 입문했다.[1] 이후 역사지리학 아그레가시옹(교수자격시험)을 취득하여 , 그르노블, 마르세유, 파리 등지에서 교사 및 강사로 활동했다.[1]

1911년 고향 카르팡트라의 시장으로 선출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고,[1] 이후 급진사회당에 입당했다.[1] 그는 두꺼운 목과 넓은 어깨, 단호한 표정 때문에 "보클뤼즈의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으나,[3] 비판가들은 그의 뿔이 달팽이 뿔 같다고 비꼬기도 했다.[4]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 전쟁 후인 1919년, 급진사회당 소속으로 보클뤼즈주 오랑주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1924년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에서 식민지 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이래, 여러 연립 내각에서 장관직을 역임했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세 차례 총리를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 공방전에서 프랑스가 항복하자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프랑스 징병 제도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이미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14년 8월,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30세의 나이로 프랑스군의 제2 외국인 보병 연대에 병장으로 동원되었다.[2]

1915년 중반, 그가 속한 제2 외국인 보병 연대는 서부 전선에서 독일 제국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큰 손실을 입었다. 연대의 생존자들은 다른 부대로 흩어졌고, 달라디에는 제209 보병 연대로 전속되었다.[2] 1916년, 그는 제209 연대 소속으로 베르됭 전투에 참전했다.[1] 같은 해 4월, 전투 중 보여준 용감한 행동으로 현장에서 소위로 진급하는 영예를 안았다.[1]

1917년 5월, 달라디에는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다시 한번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위 계급의 중대장으로 복무했으며,[1] 크루아 드 게르 훈장 또한 받았다.[1] 전쟁에서의 공적은 이후 그의 정치 경력에 밑거름이 되었다.

2. 2. 전후 정치 활동

프랑스 공방전에서 프랑스가 항복한 이후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1945년에 구출되었다. 전후 정치 활동을 재개하여 1953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 의회 하원의원과 아비뇽 시장을 역임했다. 1958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70년에 사망하여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정치 인생

1919년 급진당 소속으로 보클뤼즈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당내 주요 인물로 성장하며 1924년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의 식민지 장관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입각했다. 그는 당내 좌파 성향을 보이며 사회당(SFIO)과의 연정을 지지했다.

1933년 처음 총리가 되었으나 9개월 만에 물러났고, 1934년 스타비스키 사건 수습을 위해 다시 총리가 되었지만 대규모 시위로 인해 열흘 만에 사임했다.

1936년 레옹 블룸의 인민 전선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맡아 프랑스군의 재무장과 무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다.[32] 그는 독일의 군비 증강에 맞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고, 이탈리아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33][34][35][36] 그러나 당내 갈등으로 인민 전선 내각은 1937년 붕괴되었다.

1938년 4월 10일 세 번째로 총리직에 올라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비판받았으나, 당시 프랑스군의 미비한 준비 상태와 영국의 압력 속에서 군비 증강 시간을 벌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아 가짜 전쟁 시기를 이끌었다. 1940년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 지원 실패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폴 레노 내각에서 국방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프랑스 침공과 패전 후 비시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했으며, 종전 후 석방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3. 1. 정치 입문과 초기 활동

1924년 달라디에


1884년 6월 18일, 프랑스 보클뤼즈주(Département de Vaucluse) 카르팡트라에서 태어났다. 카르팡트라의 리세(Lycée, 고등학교) 그랑제콜 예비반(classe préparatoire aux grandes écoles)을 다니며 역사지리학 아그레가시옹(agrégation, 교수자격시험)을 취득했다. 1909년 의 리세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1911년에는 카르팡트라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 육군에 참전하여 이등병에서 중위로 진급하고 중대장을 맡았다.

전후인 1919년, 급진사회당(Parti radical-socialiste) 당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보클뤼즈주 대의원(Déput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외모 때문에 "보클뤼즈의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하원에 입성한 뒤 달라디에는 급진사회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여 당을 체계적인 현대 정당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간기 대부분 동안 그는 당 좌파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사회당(SFIO)과의 연정을 지지했다.

1924년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에서 식민지 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이래, 급진사회당이 참여하는 여러 연립내각에서 장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1926년 급진사회당과 SFIO의 결별, 그리고 1928년 중도우파 레몽 푸앵카레와의 첫 번째 좌파 연합(Cartel des gauches)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0년에는 급진사회당 및 유사 정당과의 연립 중도좌파 정부에 사회당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33년,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 임기 하에서 처음으로 총리가 되었다. 비슷한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화주의 좌파 정부를 구성했다. 비록 9개월 만에 내각이 무너졌지만, 당시 프랑스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비교적 긴 재임 기간이었다.

1934년 1월,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인 스타비스키 사건이 터지면서 카미유 쇼탕 내각이 붕괴하자, 달라디에는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는 도덕성을 갖춘 중도좌파 정부를 이끌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져 다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부는 1934년 2월 6일 폭동으로 인해 일주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달라디에의 실각 후, 프랑스는 2년간 우파 정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약 1년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달라디에는 1934년 10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민주주의를 장악했다고 여겨지는 소수의 은행 재벌, 이른바 '200가문'에 맞서는 대중적인 노선을 취하며 급진사회당 의장이 되었고, 당을 인민 전선 연합으로 이끌었다.

1936년, 그는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 전선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어 2년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방장관직 외에도 새로 설립된 최고 국방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달라디에는 프랑스 국방 정책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특히 독일의 재무장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 무기 산업 전체의 국유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민간 무기 회사들이 군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국가가 생산을 직접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36년 8월 11일 국유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는 군 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장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군사적 식견을 존중했다.

달라디에는 독일의 크루프(Krupp) AG, 라인메탈(Rheinmetall) AG 등 무기 공장들이 풀가동되고 있다는 첩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제3제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프랑스 경제 규모가 독일보다 작아 군비 경쟁에서 불리하다고 인식하고, 대규모 재무장 계획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가믈랭 장군이 제출한 규모의 육군 예산안을 너무 적다고 판단하여 을 추가했으며, 블룸 총리를 설득하여 총 규모의 재무장 계획을 1936년 9월 7일 내각에서 승인받았다. 이는 평화 시 프랑스 정부가 시도한 가장 큰 규모의 무기 프로그램이었다.

국방장관으로서 달라디에는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프랑스의 주요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고, 1937년 1월 프랑수아 달랑 제독을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달라디에는 지중해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북아프리카 식민지로부터 병력을 프랑스 본토로 이동시키고 동유럽 동맹국들과의 연결 및 무역로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탈리아의 개입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친독일 외교 정책은 달라디에로 하여금 이탈리아가 독일과 전쟁 발발 시 독일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최우선으로 견제하고, 독일 방면에서는 마지노 선을 따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전쟁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달라디에가 속한 급진당과 공산당 사이의 대립은 인민 전선 내각의 불안 요인이었고, 결국 1937년 블룸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카미유 쇼탕, 레옹 블룸의 짧은 내각을 거쳐 1938년 4월 10일, 달라디에는 다시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중도 노선으로 정부의 방향을 틀고 인민 전선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3. 2. 세 차례의 총리 역임



1919년 급진당 당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보클뤼즈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원에 입성한 뒤 달라디에는 당내 주요 인물로 부상했으며, 당을 현대적인 조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전간기 동안 당내 좌파의 핵심 인물로서 사회당(SFIO)과의 연정을 지지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여러 연립 정부에서 장관직을 역임했으며, 1924년에는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에서 식민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 급진당과 사회당의 결별, 1928년 11월 중도우파 레몽 푸앵카레와의 첫 번째 좌파 연합(Cartel des gauches)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3년, 달라디에는 알베르 르브륑 대통령 임기 하에서 처음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의 내각은 9개월 동안 유지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비교적 긴 기간이었다.

1934년 1월, 대규모 부정부패 스캔들인 스타비스키 사건으로 카미유 쇼탕 내각이 붕괴하자 달라디에는 후임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사건으로 동요하는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1934년 2월 6일 폭동 등 극심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취임한 지 약 열흘 만에 사임해야 했다. 그의 실각 이후 프랑스는 2년간 우파 정부 시대를 맞이했다.

약 1년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달라디에는 1934년 10월, 프랑스 민주주의를 장악했다고 여겨지던 소수 금융 자본가 그룹, 이른바 '200가문'에 맞서는 대중적 노선을 취하며 다시 주목받았다. 그는 급진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당을 인민 전선 연합으로 이끌었다. 1936년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 전선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어 2년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방장관직 외에도 새로 설립된 최고 국방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달라디에는 독일의 재무장 움직임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프랑스의 군비 증강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프랑스 무기 산업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국유화를 추진했고, 이는 1936년 8월 국회에서 승인되었다. 또한 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장군과 긴밀히 협력하며 규모의 대규모 군비 증강 계획을 추진하여 1936년 9월 내각의 승인을 얻어냈다. 외교적으로는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지중해에서의 해군력 강화와 영국과의 협력을 중시했다. 그러나 달라디에가 속한 급진당과 공산당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1937년 인민 전선 내각 붕괴의 한 요인이 되었다.

카미유 쇼탕레옹 블룸의 단명 내각들이 연이어 들어선 후, 달라디에는 1938년 4월 10일 세 번째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이전과 달리 중도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인민 전선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이 세 번째 총리 임기는 1940년 3월 21일까지 이어졌다.

3. 3. 뮌헨 협정과 유화 정책

1938년 뮌헨 협정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떠나는 에두아르 달라디에(중앙)


레옹 블룸 정부가 붕괴된 후, 달라디에는 1938년 4월 10일 다시 정부 수반이 되어 중도 노선으로 전환하고 인민전선을 종식시켰다.

뮌헨 협정 서명을 앞둔 네빌 체임벌린, 달라디에,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


달라디에의 마지막 정부는 뮌헨 협정 이전 협상 시기에 집권하고 있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 지역을 나치 독일에 할양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38년 4월부터 5월까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달라디에에게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동맹을 포기하도록 강하게 설득했으나 실패했고, 이는 결국 영국이 위기 상황에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 군사 전문가들은 영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독일이 프랑스를 패배시킬 것으로 보았고, 이는 국제 정세의 균형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바꿀 것이기에 프랑스-독일 전쟁 발발 시 영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6]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동맹은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을 프랑스-독일 전쟁으로 만들 수 있었다. 1938년 4월 28일~29일 런던에서 열린 영불 정상회담에서 체임벌린은 다시 한번 동맹 포기를 압박했지만, 달라디에는 프랑스가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단호히 답했다.[5] 달라디에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동맹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영국은 마지못해 수데텐 지역 위기에 개입하게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 독일인들에게 양보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체임벌린과 달리, 달라디에는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영국과의 회의에서 히틀러의 진정한 목표가 결국 "나폴레옹의 야망조차 초라하게 만들 정도의 대륙 지배"라고 경고했다. 그는 "오늘은 체코슬로바키아 차례지만, 내일은 폴란드루마니아 차례가 될 것"이라며, 독일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한 후 서방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프라하에 개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는 동시에 새로운 양보(수데텐 독일인들에게)를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방 강대국들이 다시 항복한다면 오히려 전쟁을 앞당길 뿐이라고 경고했다.[7] 그럼에도 달라디에는 프랑스가 영국 없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수입의 60%가 해상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계 최대 해군 강국인 영국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1936년부터 이탈리아가 독일과 가까워지면서 프랑스 해군의 주력이 이탈리아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여 지중해에 집중되었고, 프랑스 대서양 연안은 독일 해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기에 대서양 항로 보호를 위해 영국과의 동맹이 절실했다. 달라디에는 런던 정상회담에서 영국 해군이 싱가포르 전략을 포기하고 유럽 해역에 집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제 상황도 매우 심각했다. 1938년 5월 4일, 프랑스 프랑은 1936년 10월 이후 세 번째 평가절하를 겪었다. 달라디에는 프랑을 안정시키고자 환율을 1파운드당 176프랑으로 고정했지만, 전쟁 위협으로 인해 투자자들은 프랑스 자산 보유를 꺼렸고 이는 프랑에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가했다. 재무장관 폴 마르샹도의 특별 고문 자크 뤼프는 정부 자금이 바닥나고 있으며, 프랑스 중앙은행으로부터의 단기 대출 한도에 도달하면 프랑스가 파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38년 5월 한 달 정부 지출만 에 달했다. 수데텐 지역 위기가 계속되는 한 영국과 미국 투자자들은 프랑스 채권을 사려 하지 않았고, 이는 1938년 8월~9월 프랑스 정부에 "심각한 통화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은 1938년 11월 달라디에가 "자유 시장 자유주의자" 폴 레노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후에야 국제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며 다소 해소되었다.

동유럽 동맹국들의 상황도 비관적이었다. 바르샤바, 벨그라드, 부쿠레슈티 주재 공관 보고서에 따르면, 폴란드는 테신 분쟁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와 적대 관계였고, 독일 편에 설 가능성마저 제기되었다.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는 독일의 침공 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소련만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적군의 영토 통과를 거부하여 실질적인 지원은 어려웠다. 게다가 달라디에는 모리스 가믈랭 장군으로부터 1937~1938년의 예조프시치나(대숙청)로 인해 적군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어 "화려한 외관"일 뿐이며 독일과의 전쟁 기여도는 "거의 제로"일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1938년 9월 25일 바트 고데스베르크 정상회담에서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수데텐 지역 단계적 합병 제안을 거부하고, 10월 1일까지 즉각적인 할양 및 폴란드, 헝가리의 요구 수용을 강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달라디에는 자신의 내각에 프랑스가 "전쟁을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8] 그는 자신의 절친인 미국 대사 윌리엄 크리스천 불릿에게도 바트 고데스베르크 조건의 "굴욕"보다 전쟁을 훨씬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8] 달라디에는 프랑스 군대가 동원되고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으며, 야간 통행금지령을 시행했다.[8] 9월 26일, 그는 가믈랭 장군에게 런던으로 가서 영국군 참모본부와 참모 회담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9]

뮌헨에서 돌아온 후 르 부르제 공항 활주로에서의 달라디에, 1938년 9월 30일


그러나 1938년 9월 29일, 체임벌린은 영국 하원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자신의 견해를 재고하여 이제 뮌헨에서 위기에 대한 타협안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달라디에는 영국 없이는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느꼈고, 체임벌린이 뮌헨으로 날아갈 것이라는 발표를 듣고 그 다음 날인 9월 30일에 열린 뮌헨 회담에도 참석했다.[9]

뮌헨 협정은 히틀러가 10월 1일까지 폴란드와 헝가리의 주장을 해결하라는 등의 더욱 극단적인 요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타협이었지만, 회담은 체코슬로바키아가 10월 10일 이내에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어야 하며 영불이탈리아독일 합동 위원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달라디에는 전쟁을 피하게 되어 기뻤지만, 9월 30일 뮌헨에서 서명한 협정은 체코슬로바키아, 즉 동유럽에서 프랑스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을 배신한 수치스러운 조약이라고 느꼈다.[9] 달라디에는 파리로 돌아왔을 때 뮌헨 협정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을 우려했지만, 군중은 또 다른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환호하며 그를 환영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로, 르 부르제 비행장에 착륙하기 전에 비행기에서 열렬히 환호하는 군중을 보자, 그는 자신의 보좌관 알렉시 레제에게 돌아서서 Ah! les cons! s'ils savaient...|아! 레 콩! 실 사베...fra("아! 바보들! 그들이 알기만 한다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수상과 마찬가지로 독일을 향한 유화 정책을 펼친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그는 독일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유화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달라디에는 국방장관 경험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독일군과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군의 체제가 정비될 때까지의 유예 기간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화 정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3. 4.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과 겨울 전쟁 발발 이후, 달라디에는 프랑스 내 여론 악화에 대응하여 프랑스 공산당스탈린의 행동을 비난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당을 해산시키고 활동을 금지했다. 단치히 위기 동안 달라디에는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 로베르 쿨롱드르로부터 "프랑스가 폴란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이면 히틀러가 물러설 것"이라는 조언을 받고 큰 영향을 받았다. 1939년 8월 31일, 달라디에는 프랑스 내각에 쿨롱드르의 편지를 읽어주며 "힘겨루기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버티고, 버티고, 계속 버티는 것만이 필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26]

그러나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달라디에는 마지못해 9월 3일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으로 인한 독일에 대한 공포심과 인명 피해 트라우마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공세 의지를 꺾었고, 참전용사 출신인 달라디에 본인도 적극적인 공세를 명령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서부 전선에서는 실제 전투 없이 대치만 이어지는 이른바 가짜 전쟁(drôle de guerre|드롤 드 게르프랑스어)이 시작되었다.[30][31] 10월 6일, 히틀러가 프랑스와 영국에 평화 제안을 했으나, 달라디에는 다음 날 라디오 연설을 통해 "우리는 침략에 맞서 무기를 들었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안전, 6개월마다 위협받지 않는 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27] 1940년 1월 29일, 달라디에는 나치의 목표는 노예화다(The Nazi's Aim is Slavery)라는 제목의 라디오 연설에서 "우리에게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의 일이 있습니다... 베를린을 지배하는 광인들이 만들려고 하는 주인과 노예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구해야 합니다."라며 독일 나치즘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가짜 전쟁 기간 중 겨울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소비에트 연방을 축출하려는 국제 연맹 결의를 주도하고 핀란드에 무기를 지원했다.[32] 의회에서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 파기와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 및 파병 요구가 거세졌다. 영불 최고 전쟁 평의회(Anglo-French Supreme War Council영어)에서 달라디에는 독일에 석유를 공급하는 소련령 코카서스 폭격을 제안했으나, 소련과의 확전을 우려한 영국에 의해 거부되었다.[33] 대신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 지원을 명분으로 스웨덴 철광산과 노르웨이 항구를 점령하여 독일로의 철광석 공급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34][35] 그러나 핀란드는 의용군은 환영했지만 정규군 파병은 거절했고,[32] 스웨덴과 노르웨이 역시 독일과 소련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영불군의 영토 통과를 거부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36]

1939년 11월 12일, 뷔이유맹 장군과 부르레 장군과 함께한 달라디에


1940년 3월, 핀란드가 소련과 모스크바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겨울 전쟁이 종결되자, 의회에서는 핀란드 지원 실패의 책임을 물어 달라디에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결국 3월 21일 달라디에 내각은 총사퇴했고, 후임 총리로 폴 레노가 지명되었다. 그러나 무소속이었기 때문에 급진사회당의 지지를 얻어야 했던 레노는 달라디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달라디에는 국방장관으로 입각하는 조건으로 레노 내각에 참여했다.

프랑스 공방전 개시 직전인 5월 9일, 레노는 연합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육군 참모총장의 해임을 건의했으나, 가믈랭과 친분이 있던 달라디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5월 10일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고 프랑스군이 곳곳에서 패배하자, 가믈랭의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5월 19일 내각 개편이 단행되어 달라디에는 국방장관에서 해임되고 외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레노가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가믈랭 역시 총사령관에서 해임되고 막심 베이강 장군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6월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비시 정권이 수립되자, 프랑스 정부가 북아프리카에서 항전을 이어갈 것이라는 인상을 받은 달라디에는 다른 정부 구성원들과 함께 프랑스령 모로코로 탈출했으나, 8월 6일 비시 정부에 의해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42년 리옹에서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묻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판결 없이 중단되었다. 그는 피레네 산맥의 포르탈레 요새에 수감되었다가[28] 1943년 4월 독일군에게 넘겨져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3년 5월에는 다른 프랑스 고위 인사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티롤의 이터 성으로 옮겨져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감되었다. 전쟁 말기 친위대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터 성 전투 결과 살아남아 1945년 구출되었다.

전후 달라디에는 프랑스 제4공화국 시기인 1958년까지 국민의회(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53년부터 1958년까지는 아비뇽 시장을 역임했다. 그는 샤를 드 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1970년 사망했고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4. 전후 활동과 은퇴

1945년 5월, 히틀러 사후 독일 국방군미군 혼성부대가 제17SS기갑척탄병사단과 싸운 이터성 전투를 통해 수용소에서 구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달라디에는 1946년 프랑스 부의원에 재선되었고, 급진사회당의 젊은 개혁 지도자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1953년 아비뇽 시장으로 선출되어 1958년까지 역임했다.

달라디에는 1958년 5월 위기 이후 샤를 드골에게 권력이 이양되고 프랑스 제5공화정이 수립되는 것에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와 함께 반대했다. 그러나 그해 이후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그는 거의 50년에 걸친 정치 경력을 마치고 74세의 나이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참조

[1] 웹사이트 Obituary for Daladier http://movies2.nytim[...] 1970-10-12
[2] Master of Arts Edouard Daladier and Munich: The French Role in an International Tragedy https://shareok.org/[...] Oklahoma State University 1970
[3] 서적 Hitler and Appeasement. The British attempt to prevent the Second World War https://books.google[...] Hambeldon 2006
[4] 간행물 Charmley 1987, p. 219
[5]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1989
[6] 서적
[7] 서적 The Collapse of the Third Republic: An Inquiry into the Fall of France in 1940 Da Capo Press 1969
[8] 서적
[9] 서적
[10] 서적 German Rearmament and the West, 1932-1933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11] 서적 The French Defeat of 1940 Reassessments Berghahn Books 1998
[12] 서적 The French Defeat of 1940 Reassessments Berghahn Books 1998
[13] 서적 The French Defeat of 1940 Reassessments Berghahn Books 1998
[14] 서적 The French Defeat of 1940 Reassessments Berghahn Books 1998
[15] 서적 The French Defeat of 1940 Reassessments Berghahn Books 1998
[16] 서적 The French Defeat of 1940 Reassessments Berghahn Books 1998
[17]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18]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19]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20] 서적 Encyclopaedia of 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 The body, health care, management and policy, tools and approaches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1998-11-16
[21]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22]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23]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24]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25]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2009
[26] 서적 1939 Countdown to War Penguin 2009
[27] 서적 The Collapse of the Third Republic: An Inquiry into the Fall of France in 1940 Da Capo Press 1969
[28] 웹사이트 Fort du Portalet Office de tourisme Vallée d'Aspe tourisme Parc National Pyrénées séjours balades randonnées http://www.tourisme-[...]
[29] 웹사이트 Daladier, Édouard https://ww2graveston[...] 2019
[30] 웹사이트 DRÔLE DE GUERRE https://www.universa[...]
[31] 웹사이트 Episode 4 - Des victoires éphémères en Belgique https://www.defense.[...] Ministère des Armées
[32] 서적 欧州の国際関係 1919–1946―フランス外交の視角から たちばな出版 2008
[33] 서적 The Winter War: The Russo–Finnish War of 1939–40 Workman Publishing Company (Great Britain: Aurum Press) 2002
[34] 서적 The Winter War: The Russo–Finnish War of 1939–40 Aurum Press 2002
[35] 서적 White Death: Russia's War on Finland 1939–40 Weidenfeld & Nicolson 2006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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